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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WCOkorea

피에르 풀랭 (Pierre Poulain) 사진전

피에르 풀랭 사진전

'<예술을 통한 세계시민의식의 함양>: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과 감수성을 길러주고 다름을 연결해주는 예술에 대하여' 와 함께 전시한 사진을 공유합니다. 사진은 이스라엘 철학자 & 사진작가인 피에르 풀랭의 작품으로 그가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함께 사진에 담긴 메시지가 있습니다. 피에르 풀랭(Pierre Poulain)의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더 많은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hotos-art.org


분홍 옷의 여자아이 The Girl in Pink 

저는 인도의 대도시 뭄바이를 걸어가다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아이와 아이 주변의 모습이 서로 대조되는 풍경에 눈이 갔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버스 정류장의 지저분함과 아이가 입은 핑크색 드레스의 아름다움 사이의 대조라고 해야 할까요. 핑크색 드레스는 예쁘지만 특이한 점은 없습니다. 드레스의 아름다움은 주변의 지저분함에 의해서 드러나고 강조됩니다. 이 사진에서 주변을 물들인 회색빛들은 우리가 핑크색에 집중하도록 만들고 있어요. 마치 어둠이 우리를 “보게”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의 강렬함처럼요. 똑같은 초를 여름날 쨍한 태양이 있는 낮에 본다면, 촛불의 불꽃을 보거나 빛을 주변으로 퍼뜨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촛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를 보고 이 세상의 진짜 무대를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인류가 지난 세기 동안 이뤄온 과학 기술의 엄청난 발전은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리게 했고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 거예요. 공감, 관용, 동정심…. 이렇게 인간적인 가치를 몇 개만 떠올려봐도 이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위 “세계적인 리더”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일차적 책임을 집니다. 그들이 직접 본보기가 되어 인간적 가치들을 완전히 다른 세상의 것인 양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 중 대부분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리더”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질들도 갖추지 못했음을 몸소 끊임없이 보여주는 사람이 어떻게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겠습니까? 우리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암흑기에 들어섰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극복해야 해요. 역사는 주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는 인류 역사의 또 다른 “중세 시대”일 뿐입니다. 암흑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뿐더러 저는 이 암흑기가 마지막일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이번 주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침착하게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뜻일까요?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럽에서의 마지막 “중세 시대”는 자그마치 대략 1000년 동안 이어져 왔어요!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저는 우선 인간의 가치를 복원하는 데 비윤리적인 수단을 써서는 복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둠은 빛에 의해 물러납니다. 또 다른 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죽음과 무지는 삶과 교육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뭔가를 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 거대한 고난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메두사를 마주한 페르세우스처럼, 헤라클레스의 12가지 모험처럼, 미노타우로스를 만나고 죽이기 위해 미로에 들어가는 테세우스처럼요. 하지만 우리의 강인함 속에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작음”입니다. 하나의 양초가 빛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 어둠 속에서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의 목소리, 행동, 윤리와 인간적 가치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빛을 찾으러 다닐 때 비로소 보일 거예요. 또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바꿔놓을 거예요.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 The Veiled and the Unveiled 

실제 현실에서 좋은 흑백 사진에는 완전한 흑과 완전한 백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조금밖에 없고 대부분은 서로 다른 회색빛이 쓰입니다.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흰색은 좋은 것” 그리고 “검은색은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몇몇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그대로 보존되기 위해서는 베일에 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몇몇 사람들은 모두가 이 아름다움을 보고 무언가를 얻어 갈 수 있도록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슴은 보여야만 하나요 혹은 가려져야만 하나요? 가슴이 아니라면, 머리칼의 경우는 어떤가요? 얼굴의 경우는 또 어떤가요?

저는 진실이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진 속의 회색빛처럼 말이에요. 모든 것이 반드시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감춰져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결책은 아마도 인간의 분별력, 다른 말로 지성을 일깨우는 데 있을 것입니다.


박물관에서의 만남 Encounter at the Museum

이 장면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서 찍었습니다. 두 명의 여인이 이집트 구역을 둘러보다가 가장 유명한 이집트의 여신 세크메트를 나타낸 네 개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잠시 쉬고 있어요. 두 여인은 움직이지 않고 동상들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동상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요.이 모습은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를 대표하는 사절단들이 만나 한쪽이 먼저 나서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대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일어날 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요. 이성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과 동상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아주 명확해서 둘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을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일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이 동상들이, 예술 작품으로써, 자기가 속한 특정한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발산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예술 작품은 항상 어떤 특정한 문화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불변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일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인류의 것이지 어떤 특정한 문명의 것이 아닙니다. 진실, 선(善), 그리고 정의도 마찬가지로 시간적 공간적 격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일시적이고도 보편적인 가치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의 이집트 여신과 21세기의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미묘한 대화들을 상상할 수 있어요.  이는 또 만일 인류의 구성원들이 같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면,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순되게도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잇기보다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쉬운” 것은 삶의 목표라고 하지 않지요.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정의와 선(善)을 행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이러한 노력의 필요성이 생겨나고 우리 안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술의 힘입니다.


바다 속의 구멍? A Hole in the Sea? 

이 사진은 당연히 바다에 구멍 난 사진이 아닙니다. 이는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유럽 지중해 문명 박물관(MUCEM)의 지붕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마을의 오래된 경계선의 입구에 자리한 마조르 대성당을 배경을 두고 자리한 구멍이 잔뜩 뚫려 있는 바다가 보입니다. 역설적인 상황이네요.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사이의 관계가 이 사진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단지 호기심으로 교회가 없는 박물관의 지붕을 상상해보거나 혹은 지붕이 없는 교회를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긴장도, 대비도, 역설도 없죠. 역설의 본질은 이성적인 마음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즉 긴장을 유발하는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조금 불편한 듯한 느낌은 이 모순을 해결하고, 잃어버렸던 “편안한 상태의 마음”을 얻고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전 예술은 답보다는 질문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술의 존재는 어떤 영향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확신을 뒤흔드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이미지인지 소리인지 시인지 조각상인지 춤인지 연극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예술은 철학이 그러하듯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조화에 다가가기 위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탐구는 이전에 불편하게 느껴졌던 수수께끼와 같은 단계에서 모호함이 사라지는 새로운 단계로 의식을 확장합니다. 따라서 좋은 사진은 역설적인 사진입니다. 여러분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풍경을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할 것입니다. 결국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려는 것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탐구하기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유럽 지중해 문명 박물관(MUCEM)의 지붕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마을의 오래된 경계선의 입구에 자리한 마조르 대성당을 배경을 두고 자리한 구멍이 잔뜩 뚫려 있는 바다가 보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Decisive moment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나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직관이 필요하고 모든 시각적 요소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인지해야 하며 무엇보다 통제된 마음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기 위해서. 그 상황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 만일 여러분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때는 이미 너무 늦은 겁니다. 마법은 사라져버리고 말아요. 우리는 모두 삶에서 그런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보통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알아채지 못하곤 하지요.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의견과 주관성에 너무 갇힌 나머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보고는 감명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름다움에 관한 다양한 표현들을 감상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모든 것들, “안전지대”로부터 우리를 끌어내는 모든 것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즉 인간 사이에 균열과 분열이 많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의견이나 문화, 그리고 감정들은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고 인지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언제나 본질에는 다양성과 다름이 존재합니다. 하나로 획일화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획일성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다름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다름을 넘어서 우리 모두를 한 데 묶을 수 있는 것들을 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통합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같은 의견을 공유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간적인 인간에 속할 수 있도록 하는 몇몇 본질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그중 하나이며 이것이 예술 교육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역사적인 순간은 우리에게 늘 어려운 과제를 줍니다. 저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 순간이 얼마나 결정적인 순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슬프게도 대다수는 인식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을 위해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안은 없거든요.


원형 (La Ronda) La Ronda

저는 제가 생각하는 “조화”를 말로는 사실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사진가로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겠지요. 음악가가 소리를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사진 속의 조화는 제게 있어서 단 하나의 프레임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 이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조화를 삶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삶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지요. 삶은 움직임이지만 물리적인 움직임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 혹은 의식의 확장 역시 움직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삶의 움직임은 우리 자신의 본질과 자아에 대해 더 잘, 그리고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움직임이에요. 이러한 역동성 속에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삶의 움직임은 공간에서도 일어나지만 대체로 시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시간이 배제된 채로, 나이를 들어가지 않는다면 움직임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위해서 이런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나이와 성숙함을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의 유물론적인 문화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고 많은 사람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젊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삶 속에서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트릭스”의 모르페우스는 시작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고 말했지요.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닌 삶의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삶을 즐기는 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조화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것이다. 탱고의 끝나지 않는 비원형의 움직임은 삶에 바치는 송가와 같다.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아닙니다. 이것은 채플린의 유명한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 아닙니다. 자크 타티 영화의 리메이크도 아닙니다. 이 사진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찍힌 사진인데 이를 보면 현대 생활 리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순이 떠오릅니다. 직원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회사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동아시아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속감은 보통 자신의 개성보다 더 강합니다. 이 사진에서처럼요. 사람들은 뛰고 있지만 어떤 표정 혹은 자아나 자유 의지는 보이지 않네요.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계속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쉼 없이 뛰는 것은 어떤 행동에 대해서 실제 결과가 아닌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옛 동양 철학의 가르침이 가진 그림자와 같습니다. “바가바트 기타”로 불리는 인도의 성전에 적힌 본래의 의미는 인간은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어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하며 이 움직임 자체가 삶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그 무엇도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완벽의 이상향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매일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길은 우리가 삶의 목표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아는 것으로 시작되지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의 운명은 또 무엇일까요? 이루려고 하는 목표가 있나요? 그 누구도 우리에게 정답을 약속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을 걸어가는 것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는 모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합니다. 행동하는 겁니다. 다만 현대 사회의 터무니없는 것들에 서서히 녹아 들어가는 의미의 행동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든 경험, 모든 행동, 모든 실수로부터 무언가를 배웁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아는 더 선명해지고, 현재의 것이 되고, 매번 더 강해집니다. 달려가는 것과 희미해져 가는 것은 우리에게 살아남기 위한 선택지를 줄 뿐입니다. 하지만 매일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우리를 더욱더 살아있게 합니다.


가끔은 겁 없이 도전할 필요가 있다 Sometimes we need to Dare

가끔 우리는 겁 없이 도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은 미지의 것들에 뛰어들어야 하지요. 이스라엘의 오랜 도시인 아코의 높은 벽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젊은 사내의 사진에는 그 어떠한 조작도 없습니다. 물은 충분히 깊지만 실제로 뛰거나 실험을 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예요. 그리고 바위 밑 수면 바닥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수위가 얕을 것 같은 착각을 더해줍니다. 결국 다치지 않고 떨어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게 하지요. 모든 것이 보이는 대로 항상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삶의 길에서 우리 모두 한 번씩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용기 내서 들어가 볼까? 말까?” 와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미지의 것에 도전하는 것은 반대편에서는 알 수 없는, 한때는 수면 아래에 있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이런 새로운 세상은 거울의 뒷면에서는 보이지 않지요. 만일 우리가 그 거울의 뒷면을 “보게 된다면,” 미지의 것들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무지(無知)는 의식이 될 거예요.


지하철 The Tube

런던의 지하철은 다른 기차나 전철, 혹은 버스와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유쾌함의 장소라기보다는 외로움과 이별의 장소입니다. 모든 나라에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제 경험상 남미나 인도 아대륙, 그리고 중동의 경우 여행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유럽에서는 좀 더 어려워요. 그리고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사람들을 보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요.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관습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아요. 특히 그런 규칙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일 때 더더욱 그렇죠. 아이들은 그들의 마음 가는 대로 또 필요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필요는 언제나 통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실제로 오늘날 점점 더해가는 분열과 이해심 부족 현상을 경험할 때, 또 민주주의가 주관적인 의견들에 힘을 실어주는 도구로 전락해버릴 때, 우리는 연대하고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거나 혹은 재시작해야만 합니다. 또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낯선 사람”은 보통 그저 우리가 아직 모르는 형제라는 것을, 또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수 있음에도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을. 따라서 우리는 아이였던 시절에 가졌던 마음을 다시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제로 가능하긴 할까요? 가능해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나이는 생물학적인 연수로 계산되지 않고 희망, 상상력, 그리고 창의력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한, 하루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들을 발견해내기 위해 배고픈 상태로 일어날 수 있는 한, 우리는 젊어요. 이것이 우리 중 누군가가 80살이 되거나 혹은 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젊을 수 있는 이유예요. 또 20년 혹은 그보다 더 적은 삶을 산 노인들을 만날 수도 있는 이유예요. 젊다는 것은 삶의 한 방식이에요. 그리고 영원한 청춘은 모두에게 주어져요.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삶을 살 의지와 용기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말로는 알 수 없는 Without Words

과테말라의 라 안티구아 광장에 있는 아빠와 딸, 오토바이,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있는 이 사진을 보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떤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사진을 보면 감상에 젖게 돼요. 하지만 제가 느낀 바를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어도 적당한 단어를 못 찾겠어요. 왜냐고요? 왜냐하면 제게는 단순한 감정과는 다른 이 감성이 그 어떤 단어들보다 거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이 사진에는 이해해야 할 것이 없어요. 그저 담아둘 것만 남아있지요. 카르티에 브레송(Cartier-Bresson)은 어떤 조화, 혹은 순간적인 평형 상태를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물론 말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알고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때 단어는 생각이나 개념을 전달하는 데 꽤 효율적인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단어로 이 깊은 감성까지 전달할 수 있을까요? 혹은 단어로 직관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단어들은 정말로 지성을 담아내는 그릇인가요? 아니면 지성이란 것이 애초에 단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별력을 의미하는 건가요? 단어는 빛을 낼 수 있나요? 혹은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나요? 아니요. 단어는 예술적 경험을 위해서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인가요?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가요? 자연과 하나 됨을 느끼고 명상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가요? 역시나 답은 “아니다”입니다. 단어는 중요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어들의 뒤에는 전체의 커다란 삶이 있습니다. 의식이 깨어나 고양된 상태에서는 단어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 대신에 이를 이해하는 수준에서 끝내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이해하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어요.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이해했다면 더는 그 현상을 경험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아니길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는 것”과 “사랑을 시작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선택은 뻔할 것입니다. 사랑은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로는 사랑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어요. 아무리 세심하고 정확한 단어들을 사용한다고 해도요. 이 감성,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가질 것인가 가지지 않을 것인가 To Have or not to Have?

제가 2014년 2월 인도의 벵갈루루에 있을 때, 저는 꽃을 파는 시장에 있던 두 상인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한 분의 가게에는 팔 꽃이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한 분의 가게는 꽃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한 명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내가 다음날 이 시장에 다시 들른다면 그때의 모습도 지금과 똑같을까?” 어쩌면 완전 반대의 상황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소유”는 언제나 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때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가도 어떤 때는 갖고 있지 않지요. 우리는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해요.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믿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나요?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임, 그중에서도 내면의 움직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의식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아는 것,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잠재력과 자질에 대해 알고 더불어 우리의 단점, 내면의 그림자 역시 알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깨어난 의식은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우리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움직임은 순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즉 우리 자신의 의지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유를 향한 길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자신을 가두는 것은 우리를 외부 환경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지는 것”을 포기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오늘날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형을 이루도록, 또 우리가 필요한 것만 가지도록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을 만큼 만요. 그저 필요한 것들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존재하기 위해서.



피라미드의 천사 The Angel of the Pyramid

루브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 중 하나이며 실제로 굉장히 특이한 컬렉션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피라미드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재임 시절에 만들어진 역시 꽤 유명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의 수위는 이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진은 피라미드의 안쪽에서 찍을 기회가 생겨 찍게 된 사진입니다. 그는 박물관의 정문 출입구 광장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플렉시 유리에서 반사된 빛이 피라미드의 구조를 관통하는 빛과 합쳐져 그를 마치 천사처럼 보이게 합니다. 딱히 수위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그러니까 아마도 “수호천사” 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 때 당시에는 이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제가 왜 이 특정한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마치 제가 내린 결정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제 인격 너머의 무언가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대답하듯 찍은 것 같았어요.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동일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격은 정말 우리 자신인가요? 성격(Personality)은 “페르소나”라는 말의 라틴어에서 차용되었는데 본래 “가면”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격이 우리의 가면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누굴까요? 논리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가면 아래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면을 발견하고, 그 가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고 공부하고, 또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모든 철학자가 추구하던 본래의 목표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쓰였습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를 알게 된다면 우리의 가면은 틀림없이 확실해질 것입니다. 또 “진정한 자아”는 행동하기 시작하고 느끼고, 또 통제 아래 있을 수 있게 됩니다. 많은 문화권과 플라톤을 포함한 철학자들이 예술과 진리, 선(善), 정의와 연관 지어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러한 “진정한 자아”입니다. 우리 자신의 아주 깊은 부분은 우리의 의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해 움직입니다.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소리나 형태, 시, 그림, 조각, 교향곡, 음악, 춤 등 어떤 형태로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 또는 원형의 본질을 눈에 보이게 혹은 들릴 수 있게 표현하는 데 사용된 수단이 아닙니다. 예술을 표현해내는 그 특정한 순간에 예술가의 자아는 더 깊어질 것이고, 눈에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영적인” 자아가 될 것입니다(종교적인 단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의견을 드러내는 성격의 가면이 아닌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의견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절대로 예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모두 예술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주관적인 특정한 의견을 먼저 죽여야 해요. 어떤 의견도 모두에게 보편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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